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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9/03/02 이경희 선생님이 전하는 꿈 실천법
- 2009/01/15 꿈꾸는 소셜디자이너를 찾아서 : 윤희 '꿈'으로 날다
이경희 선생님이 전하는 꿈 실천법 제 1조,
“하고 싶은 게 있으면 그냥 하면 되는거야”
그는 전직 교수이지만, 선생님이란 호칭보다 ‘샘’이라는 호칭이 더 어울린다. 머리보다 발을 먼저 쓰는 사람에게서 느껴지는 특유의 시원시원함이 있고, 무엇보다 활기가 넘치기 때문이다. 과감히 안정된 자리를 박차고 나오는 용기와 자신의 생각을 행동을 옮길 수 있는 실천력을 갖춘 그는 한마디로 열.혈.젊.은.이였다.
꿈은 행동하는 자의 것
2009년 1월 8일 희망제작소에서는 신년을 맞아 신영복 교수의 강연을 준비했다. 신영복 교수는 학기 중은 물론이고 외부강연을 잘 하지 않기 때문에 이 같은 대중강연을 듣는 건 흔치 않는 기회였다. 수강료가 있었음에도 120여명이 참석해 강연장이 미어터질 정도였다. 미리 기증받은 신영복교수의 서화 열점도 성황리에 판매되었다. SDS 1, 2기가 합동으로 준비했던 이날 강연은 대성공이었다. 이 강연을 성사시키기 까지 많은 이들의 노고가 녹아있었지만, 뭐니 뭐니해도 이 강연을 주역은 SDS 1기 이경희 선생이었다.
<진지하게 경청하는 청중(위)과 열강하는 신영복 교수(아래)>
이 모든 건, 한 사람의 꿈에서 시작됐다. SDS 1기 이경희 샘은 6개월 전, 수업 종강식에서 신영복교수의 강연을 듣고 싶다는 꿈을 발표했다. 이를 들은 박원순 상임이사가 직접 신영복 교수에게 연결을 시켜줬고, 소셜디자이너 스쿨 1,2기 회원들이 나서서 그 꿈을 착착 실행해갔다.
“개인 꿈이기도 했지만 함께 기획하고 진행하면서 공동의 꿈이 된 게 아닌가...한 사람 한 사람 감동을 받았다고 얘기하니까, 마치 내 꿈을 이뤘다기보다는 많은 사람 꿈을 한꺼번에 이룬 게 아닌가 생각이 들어요. ”
안돼?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가봐!
이경희 샘은 평소 인터넷을 즐겨 하는데, 해피시니어 프로그램에 관심이 커서 그와 관련된 자료를 검색하다가 희망제작소를 알게 됐다. 그 때 우연히 SDS 1기 뽑는다는 공고를 봤다. 박원순 상임이사가 강연한다는 걸 보고 바로 신청했지만 때는 늦었다. 마감 하루 전이라 이미 정원이 꽉 찼던 것. 더 이상 신청할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이경희샘은 여기서 포기하지 않는다. ‘안된다고? 하게 해야지’ 당장 담당 연구원에게 전화를 걸어서 “나를 1번 대기자로 넣어달라” 고 부탁했다. 결국 제작소측은 그를 포함해 다른 대기자들까지 모두 넣어주겠다고 결정했다.
“내가 끝까지 해보는 성격이 있어요. 되든 안 되든. 나는 학생들한테도 말해요. 원하는 게 있으면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해봐라. 그래도 못하면 ‘아, 내가 최선을 다했는데도 안 되면 어쩔 수 없다’ 하지만, 그런 게 아니라면 끝까지 가봐야지. 내 인생에 그런 게 많아요.”
그는 지난학기를 끝으로 중앙대학교 교수 자리를 그만두었다. 20년을 넘게 해온 일이었고, 그것도 남들의 선망의 자리인 교수직이었다. 동료교수들은 그 소식을 듣고 어떻게 그럴 수 있나 패닉상태였다고 했다. 하지만 이건 그의 문제였다.
<신영복 교수 강연에서 진행하는 이경희 샘>
“그동안 열심히 살았지만, 이게 뭔가 사회와의 관계에서 내가 얼마큼 공헌하고 있는가에 대해선 미진하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논문이 어떤 역할을 하고 사회를 얼 만큼 변화시켰나 하는 데엔 점점 비판적인 생각이 들었지요. 작년부터 이걸 곰곰이 생각해오다, 11월초 ‘그만두자’ 완전히 결심했어요. 계기가 된 건 여러 가지였는데, 어떻게 보면 자잘한 것들이 어느 날 빵 터져버린거지.”
그에겐 멘토 같은 선배가 있다. 대학부터 알고 지낸 그 선배는 일에 치여만 사는 남편에게 ‘사람답게 살자’며 퇴직을 권고하고 6개월간 휴가를 주었다. 그리고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몇 년에 한 번씩 만나는데, 한국에서보다 훨씬 더 소박하게 사는데도 무척이나 행복해 한다고 했다.
“굉장히 씩씩하고, 소박하게 사는 것에 대해 두려움이 없어요. 의사결정을 할 때면 늘 생각날 정도로 그에게 많은 영향을 끼친 사람에요. 한번은 교수한다고 했을 때 그 선배가 한마디 했어요. ‘왜 교수하니? 넌 딴 걸 훨씬 잘 할 거 같은데 아깝다. 교수 말고도 할 일은 많아.’ 그 말을 듣고 곰곰이 생각했다. 내가 교수 왜할까.”
당시 그가 생각해낸 답은 ‘막연한 생활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어려운 시대를 겪으면서, 공부 열심히 해서 좋은 직장을 가져서 안정적 생활을 해야겠다는 욕구가 컸다. 이건 그 뿐만이 아니라 많은 이들의 욕구이기도 했다.
시간이 갈수록 다른 생각이 들었다. 평소 사회적 기업에도 관심이 많아서 여러 단체에 기부도 하고 자원 활동도 했다. 6년 전 지리산 어느 골짜기에 있는 지인 집을 방문했다가 완전히 반해서 그곳에 집을 지어놓고 서울에 왔다 갔다 하며 지내기도 했다. 남들은 이경희 샘에게 하고 싶은 일은 하며 살았다고 하지만, 정작 본인은 한계를 느꼈다. 직업을 가진 이상 내가 하고 싶은 일에 완전히 몰두할 수 는 없었다. 지금 교수하는 게 최선 일까? 박원순 상임이사가 말한 직업 10계명에서 ‘마지막이 꼭 필요하지 않은 자리가 아니면 떠나라’ 이게 또 마음에 남았다.
“그때 무슨 책을 읽었어요. ‘우리가 확실하게 가진 건 시간밖에 없다’ 이런 말이 나오는데 그게 굉장히 맘에 와 닿았어요. 우린 굉장히 많이 가졌다고 생각하는데 실제로 가진 건 시간밖에 없잖아요. 그래서 내가 이 시간을 어떻게 쓸까 굉장히 깊게 생각하게 됐죠. 그러고 나니 시간이 굉장히 소중해지더라고. 게다가 내가 건강할 때 쓸 수 있는 시간이 얼마나 되냐? 그렇다면 내가 하고 싶은 걸 해야지.”
가족회의를 거쳐서 가족의 동의를 구했다. 두 아이와 남편의 전폭적 지지 하에 사표를 제출했다. 교수자리에 오르는 건 무척 힘들고 많은 시간이 걸렸는데, 그만 두는 건 쉬웠다. 사직서 한 장 쓰는 데 5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사람들이 나한테 와서 말하죠. ‘너무 좋겠다. 나도 이렇게 살고 싶다’ 하지만 안 해요. 내가 보기엔 다 할 수 있는데 대부분 안 해요. 전 근데 할 수 있게 됐다는 거. 학생들과 자주 못 만나는 건 서운하지만,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게 마치 유치원생이 된 것처럼 참 신나요.”
말보다는 행동으로, 머리보단 발로 뛰기
그는 희망제작소의 모금 운동 중 하나인 ‘희망 집짓기’ (클릭! 해보세요^^)를 시작한 멤버이기도 하다. SDS 교육프로그램 중 모금론 강의를 통해 그의 팀에서 나온 모금기획안이었다. 집터 마련을 목표로 기부를 받는데, 금액에 따라 벽돌하나, 주춧돌 놓기 등 시각적으로 보이게 만들어 아이디어를 실제 행동으로 옮겼다. SDS 활동도 열심, 기부운동도 열심인 그가 만약 희망제작소 연구원으로 일하게 된다면 무슨 일을 하고 싶은지 궁금해졌다.
“글쎄 ……. 제가 하고 싶은 건 온 도시, 온 마을 꽃으로 덮는 거예요. 되게 주책 맞은 생각이죠? 돈이 되는 건 아닌데, 여러 나라 여행하면서 항상 마음속에 좋다고 느꼈을 때를 보니까 정말 꽃이 많은 도시더라고요. 시민들이 다 같이 도시를 아름답게 꾸며갔으면 좋겠어요.”
실제로 예전에 단독주택 살 때 이웃집 몇 군데에 꽃 화분을 2개씩 나눠준 적이 있었다. 다들 꽃을 심어서 집밖에 달았는데, 그게 바이러스처럼 퍼져서 2-3년 뒤에는 스무 집 이상이 그렇게 꽃을 달았다고 했다. 그렇게 작게 시작해도 충분한 일이다. 참 멋진 일이라 동조했더니, 이경희 샘은 <우리나라 골목에 맞는 화분> 빨리 디자인 시작하자며 대뜸 사업제안부터 해오셨다. 정말 행동력 하난 못 말리신다. 그랬던 그였기에 많은 사람들이 선망하는 ‘교수’라는 직업을 빵 걷어차 버리고 나올 수 있었을 테다.
“전 책상에 앉아 기획 하는 거보다 한 송이라도 직접 꽃을 심고 싶어요. 신영복 선생님 강의에서 인상 깊었던 게 머리, 가슴, 발이 있는데 나는 발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하거든요.”
SDS? 안가면 네가 손해야
그는 SDS 오면 좋은 게 많은데, 무엇보다 좋은 건 사람들이라고 꼽았다. 젊은 사람부터 나이든 사람까지, 직업도 각양각색인 사람들이 오직 ‘꿈을 꾸고 실천하기 위한 열망’하나로 모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들 서 있는 위치는 다르지만 금방 친해지게 된다. 사람들끼리의 네트워크에서 많이 배운다고 했다. 그가 꿈꾸는 세상도 ‘더불어 사는 사회’다.
SDS 수업은 그에겐 너무 아쉬운 강의다. 이유는 단 하나. 너무 적은 수가 듣기 때문이다. 40명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 특히 젊은 사람들이 들어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그래서 자신의 아들도 추천해 듣게 했다. 이경희 샘은 더 많은 홍보가 더 필요하다고 적극 주장을 펼치셨다.
“미국에서 지내면서 놀랐던 점은, 학교 청소부한테 물어봐도 자기가 관여하는 조직이 대 여섯 개는 될 정도로 사회에 대한 의식이 높다는 거였어요. 하지만 우리에겐 그런 게 좀 부족해서 아쉽죠. 어렸을 때부터, 자원봉사든 기부든 무엇이든 사회의 일원으로서 사회에 대한 봉사나 기여를 해야 하는데 그런 교육이 부족해요. 그래서 교육이 중요하고요.”
마지막 고별강연에서도 학생들에게 강조했던 것은 ‘꿈’이었다. 그는 내가 얼마나 기여했고, 어땠다 이런 애기를 하는 대신 내가 학교를 그만두면 할 수 있는 게 뭘까 그걸 ‘버킷리스트’로 만들어 학생들에게 얘기했다. 그가 전해주고 싶은 메시지는 하나.
“나도 이 나이에 이런 꿈들을 품고 사는데, 너희들도 더구나 젊지 않니. 이 말이 마음에 와 닿을지는 모르겠지만, 우선 막연한 꿈이 아니라 구체적인 꿈을 가지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그걸 가지고 절대 포기하지 말 것.”
아직 무엇을 할지 구체적인 계획은 없다. 교수직을 그만두고 나니까 생각이 너무 복잡해졌다. 주위에서 이것저것 요청도 많이 들어온다. 하지만 우선은 6개월을 아무것도 안하고 주변정리 할 계획이다. 연구실 책도 주변에 다 나눠줬다. 그렇게 정리를 싹 하다보면 내가 진정 하고 싶은 일이 뭔지 정리가 될 것 같다고 했다.
“어느 정도 생활도 안정되었으니, 정말 봉사를 맘 놓고 할 수 있는 시기인거 같아요. 어떤 일인지 모르지만. 또 알아요. 희망제작소에 들어가서 할지. 호호호”
남은 시간 뭘 할까……. 고민하고 있지만, 그의 말을 들으면서 이미 마음속에 길은 정해진 것처럼 보였다. 봉사, 발로 뛰는, 더불어 살기, 교육……. 몇 가지 키워드가 이미 그의 주위에 맴돌았다.
마지막으로 SDS를 다른 사람에게 한마디로 소개해달라고 했더니 딱 한마디 했다.
“안가면 네 손해다”
<희망제작소의 소중한 희망씨, 이경희 샘>
인터뷰 by 김귀자
희망제작소 박원순 상임이사의 명함에는 소셜 디자이너라는 직함이 찍혀있다. 사회를 새롭게 상상하여 디자인하고 밑그림을 그려보는 사람인 소셜 디자이너, 희망제작소에서는 더 많은 소셜 디자이너들을 양성하고 발굴하기 위해서 소셜 디자이너 스쿨을 운영하고 있다.
이 소셜 디자이너 스쿨을 수료하기 위해서는 종강워크숍에서 자신의 꿈프로젝트를 발표해야한다. 그렇다면, 소셜디자이너스쿨 수료생들은 자신의 꿈들을 어떻게 실현하고, 수료 이후에 소셜 디자이너로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릴레이 인터뷰: “꿈꾸는 소셜디자이너를 찾아서>
사업을 진행해온 팀은 자신의 꿈을 향해 용기있는 나아간 ‘소셜디자이너’들을 만나기로 했다. 그들이 꿈을 이루기까지 거쳐온 여정을 함께 들어보고, 우리 모두의 꿈이 이뤄지는 그날까지 릴레이인터뷰는 쭉-- 계속될 예정이다.
첫 번째 순서로 이윤희씨를 만나보았다. 이윤희씨는 지난 해 말에 희망제작소의 공공갤러리에서 전시회를 열었었다.
(희망제작소의 공공갤러리는 작가의 작품을 전시하고, 판매액의 일정액을 희망제작에 기부하는
공익적 성격의 갤러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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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11월 21일 금요일. 이날은 한 사람에게 아주 특별한 날이었다.
소셜디자이너 스쿨(SDS) 1기 수강생이었던 이윤희씨, 그의 꿈이 이뤄진 날이었기 때문이다.
“안녕하세요? 이윤희입니다. 저는 늘 도전하고 아파하며 배우는 사람입니다.
때론 바보같고 때론 똑똑합니다. 제 꿈은 조형예술가입니다.
하루하루 노력하다 보면 꿈이 이루어지는 날이 있겠죠? ^^ “ -SDS 다음카페 소개글 중
윤희씨는 종강워크숍에서 <Someday>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꿈을 발표하면서 “언젠가 나만의 작품으로 전시회를 하고 싶다”고 수줍게 말했다. 그리고 4개월 후, 윤희씨는 희망제작소 갤러리에서 작지만 아름다운 전시회를 열었고, 가슴떨리는 생애 첫 전시회에서 펑펑 울었댔다.
소셜디자이너스쿨 종강워크숍때 발표하는 이윤희씨
우리는 <꿈꾸는 소셜디자이너를 찾아서>라는 이름으로 릴레이 인터뷰를 시작하며 윤희씨를 첫 번째로 만나보기로 했다. 약속날이 12월 23일 저녁, 윤희씨가 희망제작소에 환하게 웃으며 들어섰다. ‘아, 저게 행복한 사람의 모습이구나’ 알 수 있을 정도로 그는 무척 편안하고 행복해보였다.
꿈은 ‘Someday’ 아닌 ‘right now'다!
- 내 생애 첫 전시회를 했는데, 꿈을 이룬 기분이 어떤가?
“전시회는 꿈도 생각 안했다. 붕 뜬 거 같았다. 꿈인지 생시인지... 좋으면서도 한편으론 부담스러웠다. 전시를 한다는게 결국 나를 내보인다는 건데. 부끄러웠다. 좋으면서도 어려운 거란 걸 알았다. 잘 그린 그림은 아니지만, 내가 좋은 그림이어서 너무 좋다. ”
오프닝
- 전시회 하고 나서 어떤 변화가 있었나?
“아직 변화는 모르겠다. 일하면서 (전시회) 준비하느라 끝나고 나서 약간 앓았다. 정신적, 육체적으로 힘들었는데, 요즘 다시 회복하고 있다. 기쁠 줄만 알았는데 사람들의 평가를 무시할 수가 없다. 사람들의 한마디 한마디가 상처가 되기도 했다. ‘예술은 주관적인거다, 너무 연연해지지 말자’ 마음먹고나서 좀 편해졌다.”
- 그림은 윤희씨에게 어떤 의미인가?
“그림은 행복이고, 감히 말하긴 어렵지만, 내 생명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전시회 전경
- 전시회 오픈날, 많이 울었다던데...
“아..부끄럽다. 완전 대성통곡했다. 죽기 전에 전시를 할 수 있을까 생각이 들어서 전시회를 한다는 거 자체가 감동이었다. 그리고 (그 길을 걷기까지) 나름의 아픔이 많았다.
내 인생의 터닝포인트, 행복하려면 마음으로 아파봐야한다
윤희 씨의 꿈은 원래 인권변호사였다. 그래서 법학과에 들어갔다. 공부해보니 막상 자신과 맞지 않았다. 결정적으로 변호사를 해도 행복할거 같지 않다는 생각에 꿈을 접었다. 그리고 감행한 유럽여행, 그는 그곳에서 처음으로 미술에 관심 갖게 됐다.
“프랑스 미술관에서 고흐의 감자를 보고서 ‘뜨악’했어요. 바구니에 감자만 있는 단순한 그림인데 그 터치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더구요. 그때 찌릿했죠. 그 그림에서 못 벗어났어요. 그때부터 그림이란게 눈에 들어왔어요. 계속 미술관에 다니면서 진짜 좋다는 생각이 들었죠.”
하지만 미술을 해보겠다는 생각보다 단순히 ‘미술애호가’로만 지냈다. 그러다 직접 미술계에 뛰어들 기회를 잡게 된다. 대학 졸업할 무렵 제주도에 있는 ‘아프리카 박물관’에서 일자리를 제의를 해왔던 것. 고민하다가 큰맘 먹고 내려갔다. 그리고 아프리카 박물관에서 에주케이터(educator)로 1년 반동안 일하게 된다. 하지만 일할수록 허무해졌다. 마음에 끓어오르는 게 뭔가가 없었다. 대신 내가 표현하고 싶은 걸 직접 해보고 싶다는 욕구가 치솟았다. 마침내 ‘작가가 되어야겠다’고 결심하고 다시 짐을 싸서 서울로 올라왔다.
그림을 하겠다고 마음먹고 무작정 홍대 근처의 작업실에 들어갔다. 매일아침 홍대 앞을 걸으면서 ‘이게 정말 행복이구나’ 느꼈다. 꿈을 성취했을 때보다 꿈을 향해 걸어갈 때가 더 행복했다.
“행복하지 않은 사람들은... 아파봐야 할 거 같아요. 나도 처음에는 행복이 목표가 아니었다. 근데 (몸이) 아프면서 내가 왜살까.. 생각을 많이 했고 행복하게 살아야겠다고 깨달았어요. 이걸 느끼기는 어렵다. 각자 계기가 있어야 할 거 같다. 특히 내면적으로 아픔이 컸죠.”
처음에 미술 한다고 작업실에 들어갔을 때, 안 좋은 소리도 많이 들었다. 어머니는 대놓고 “넌 재능이 없는거 같다”며 “넌 아닌 거 같다”고 말씀하셨다. 예술학교를 준비했다가 2차에서 떨어지기도 했다. 그때 낙심을 많이 했다. ‘아.. 내가 재능이 없는 건가’ 하지만 그를 끝까지 끌고 온건 열정이었다. 그래도 그림이 좋고, 너무나 하고 싶었다.
“난 사실 그때도 재능이 없다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난 분명 하고 싶은 미술이 있었고, 그게 좋았기 때문에 나는 그게 재능이라고 생각했죠. (아주 확고하게) 재능보다는 내가 얼마나 열정을 쏟아부을 수 있는가 이게 중요한거죠.”
누가 뭐래든 내가 맞다고 생각하면 결국 그길로 가게 된다. 윤희씨가 그의 산 증인이다. 인생에 꿈이 없으면 의미가 있을까? 자기만의 무언가를 찾기 위해선 시행착오가 필수다. 시도해보는 과정에서 내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조금씩 알아가게 된다. 윤희씨는 꿈을 이룬 사람만이 지을 수 있는 ‘행복한’ 얼굴로 말했다.
“많이 헤매세요. 그리고 두려워하지 말고 도전해보세요.”
내 인생의 봉, 소셜디자이너 스쿨과의 만남
이제 윤희씨와 소셜디자이너 스쿨의 인연을 정리할 시간이다. 사실, 윤희씨가 SDS를 수강한 계기는 좀 불순했다. 희망제작소에서 일해보고 싶은 마음에 이 강의를 들으면 나중에 연구원으로 지원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했단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윤희씨는 현재 녹색연합의 전문기관인 환경소송센터에서 일하고 있다. 몇 해 전 사진작가 고(故)김영갑 사진전시회에서 자연을 표현한 그의 글과 사진을 보고나서 뭔가 찡함을 느꼈다고 한다. 언젠가 환경에 도움이 되어야겠다고 마음먹었고, 현재 일에 만족한다.
인터뷰하는 귀자씨와 윤희씨
- Social Desing School(SDS)이 꿈을 이루는데 어떤 영향을 줬나
“SDS가 전시회를 여는데 절대적인 도움을 줬다. 박원순 변호사가 당장에 하자고 했는데 나도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더라. SDS 1기들끼리 한 달에 한 번씩 모인다. 그때마다 다들 언제 전시회 할거냐고 얘기해주시고, 카페에도 말씀을 해주시는 게 큰 격려가 됐다.”
- SDS를 수강한 소감을 말해달라.
“강의내용도 놀라웠지만, 정말 다양한 수강생들에 놀랐다. 이런 분들도 있구나. 그런 분들이 있다는 거자체가 삶의 희망이 있다. 긍정적 영향을 많이 받았다. 또 좋았던 게 박변호사님의 강의였다. 살면서 힘들고, 상처도 많았는데 그걸 이겨내고 자기만의 깨달음을 얻고 살아내신 게 내게 큰 용기와 희망을 주었다. 상처 받아도 힘들어도 다시 일어서자, 그런거.”
- 소셜디자이너로서, 윤희씨가 꿈꾸는 사회는 어떤 모습인가?
“사람들이 행복하게 사는 사회? 난 사람들이 꿈을 이루는 것이 행복한 거라 생각한다. 자신이 행복해야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해줄 수 있다.”
- SDS를 한마디로 정리한다면.
“우리사회를 좀 더 좋은 사회로 바꾸기 위해 필요한 여러 가지를 배우는 곳! 삶의 긍정적인 에너지를 불어넣는 강의다.”
-소셜디자이너들에게 남기고 싶은 말?
“꿈을 가져라. 그리고 행복하게 사셨으면 좋겠다.
그게 내가 해줄 수 있는 최고의 말이다.
수업 잘 듣고! 하하 “
인터뷰는 예상했던 30분을 훌쩍 넘어 한 시간 반이 지나서야 겨우 마무리됐다. 사실 윤희씨의 이야기를 담기엔 그것도 짧은 시간이었다. 조용하기만 할 것 같던 윤희씨는 말문이 한번 터지자 폭포수처럼 자신의 이야기를 쏟아냈다. 그의 열정에 나의 마음도 함께 뜨겁게 데워졌다. 자, 다음 릴레이 인터뷰의 주자는 누가 될 것인가?
기대해주세요!^^
인터뷰 by 김귀자, 김남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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